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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2/02 01:09

왜 강제퇴거금지법인가?

경희대 교지 고황 게재


임시방편 용역 규제

 “폭력을 행사해 주민 한 명이 이빨이 나갔고 3명은 병원에서 치료받고 돌아왔다.”(포이동), “밖으로 빠져나간 용역들 중 어떤 것들은 어디선가 소화기를 구해와 분이 풀릴 때까지 뿜어댔고, 빈 소화기를 한 여성의 머리 위로 집어던졌다.”(명동), “용역깡패들은 쇠지렛대를 이용해 창문을 뜯어내고 소화기를 뿌려댔다. 지붕 위에서는 항아리를 던지기도 했다.”(상도4동)……. 재개발 현장 마다 ‘용역’이 꼭 등장한다. 그들은 자고 있던 사람들을 들어내고,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협박을 하고, 폭행하곤 한다. 얼마 전에는 재개발 지역의 사진 한 장이 보는 사람들의 공분을 자아내기도 했다. 산만한 덩치의 용역들이 할아버지 한 분을 벽에 몰아놓고 조롱하듯 목을 짓누르고 있는 사진이었다. 애처롭게도 할아버지는 손에 “용역깡패 무법천지”라는 항의구호가 담긴 팻말을 들고 있었다. 도처의 재개발 지역에서 용역들에게 맞아서 피가 흐르는 이마, 시퍼런 멍 자국, 깨져버린 가재도구들 등이 찍힌 사진이 인터넷에 오르고 그 때마다 많은 이들이 분노했다. 과연 어떻게 저런 폭력이 자행될 수 있는 것인가, 경찰은 무얼 하고 있는 것인가….

 어느 날 갑자기 자기가 살던 집에서, 장사하던 곳에서 내쫓기는 사람들이 순순히 명령에 따를 것이라고 기대한다는 건 사람살이를 너무 단순화하는 것이다. 나갈 수 없다고 저항하는 거주민들과 이들을 어떻게든 내쫓으려는 용역 간에 물리적인 충돌도 그래서 자주 발생한다. 이 과정에서 거주민들을 하루라도 빨리 내쫓으려는 용역들이 행사하는 무리한 폭력이 보는 사람들의 공분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어떻게 저런 일이 벌어질 수 있을까?’ 폭력 사실을 접한 이들 대다수가 분노하지만 폭력은 이를 아랑곳하지 않는다. 법이 용역의 편이기 때문이다. 장세환 민주당 의원이 지난 19일 공개한 '최근 3년간 노동자·철거민, 시설주·용역업체에 대한 불법행위 수사결과 분석 자료'를 보면, 입건된 노동자·철거민 4197명 가운데 3832명(91.3%)이 기소됐지만, 용역업체 직원 등 시설주 쪽에 고용됐다 입건된 288명 가운데 기소된 사람은 116명(39.2%)에 불과했다. 철거민 대다수는 기소됐지만, 기소된 용역은 절반도 되지 않는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정치권 일각에서는 용역을 규제하려는 응급책도 제안하고 있다. 정동영 의원이 발의한 ‘경비업법 일부개정안’이 그것이다. 무허가 경비업자에게 용역경비를 의뢰하는 것을 금지하고, 사전 교육을 받은 뒤 (명부에) 기재된 경비원만 현장에 배치하며, 조직폭력배의 용역경비 투입을 금지하는 등 폭력사태를 사전에 막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핵심골자다. 사태의 심각성이 여러 방면으로 제기되자 수수방관하던 경찰도 지난 21일 ‘용역폭력종합대책’을 내놓았다. 민원 현장에는 경비업법상 허가된 경비업체만 업무를 볼 수 있도록 하고, 용역 폭력에 대해서는 조직폭력에 준해 엄히 처벌하는 등 적극 대응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규제받지 않고 임의적으로 행해지던 용역의 폭력을 제어하려는 공권력의 노력이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일단 반가운 발표다. 다만 임시적이고 응급책에 불과하다는 것 또한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용역 폭력에 관한 규제는 ‘어떻게 내쫓을 것인가’에 대한 것일 뿐, ‘내쫓는 것’ 자체에 대한 진지한 물음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권을 사유해야 하는 지점

 실제로 분노하는 여론에도 불구하고 용역들이 태연자약하게 폭력을 자행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의 행위 상당수가 합법적이기 때문이다. 도리어 법을 위반하고 있는 것은 떠나지 않겠다고 버티는 거주민들이다. 막대한 이익이 날 수 있는 장소를 떠나주지 않는 ‘그들’ 때문에 건설사와 재개발 조합은 용역과 ‘계약’을 체결해 ‘그들’을 내쫓는다.

 현재 진행되는 도시정비사업은 소유권에 입각해 가옥 소유주들만 조합원으로 인정하고 있다. 사업 진행 중에 공식적으로 세입자들의 의견을 조사하고 수렴하는 과정은 포함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세입자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던 곳에 대해 어떤 의견도 낼 수 없는 첫 번째 ‘그들’이 된다. 저렴 주거가 갈수록 줄어들면서, 세입자들은 기존에 자신들이 지불하던 액수로는 지내던 수준의 거주지에 살기가 어려워지고 있다. 세입자들은 점차 수도권 외곽으로 내몰리고 있다.

 한편 이윤이 날 수 있는 지역에 몰려 진행되고 있는 실정이다. 세종대학교 변창흠 교수는 국토해양부 등이 2009년 발표한 『도시재생 법 제도 및 지원수단 개발 연구보고서 보완본』를 분석하여 전국 70개 재정비촉진지구 중 35개가 서울시에서 지정되었고, 인천시 8개, 경기도 14개 등으로 수도권에 57개로 81%가 집중되어 있다고 지적했다. 사업 진행의 최우선 목표가 이익 극대화에 맞춰져 있다 보니 사업을 추진하는 건설사와 재개발 조합은 보다 넓은 평수의 고급 주택을 지으려는 경향을 보인다.

구분

전용면적 60m2 이하

매매가 5억 원 미만

전세가 4천만 원 미만

사업 전

63%

86%

83%

사업 후

30%

30%

-



 가옥 소유주들도 사업 후 면적이 넓어지고 값비싸진 주택에 다시 들어가기 위해서는 적지 않은 추가 분담금을 지불해야 한다. 전세를 놓았던 가옥주의 경우에는 세입자에게 전세금을 돌려줬기 때문에 추가로 부담해야 하는 액수가 만만치 않다. 이는 재정착이 어려워지는 이유가 된다. 사업 초기에 추가 분담금에 관한 정확한 정보를 제공받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이기 때문에 사업이 진행되는 과정 중에 이것을 부담으로 느낀 가옥 소유주들이 재개발 사업을 반대하고 나서기도 한다. 이들이 두 번째 ‘그들’이다. 이미 진행되고 있는 사업을 되돌릴 수 있는 현실적인 방법이 없는 이상, 사업을 진행하는 건설사와 재개발 조합에게 ‘그들’은 공사를 늦추게 하는 돌덩이에 불과할 뿐이다.

 재개발 지역에서 갈등이 발생하는 것은 갈등 상황에서 당사자들끼리의 이익이 서로 모순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지 이익의 조정 차원에서 머물지 않고 재개발 사업이 인권의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러한 권리와 정보의 비대칭 때문이다. 소유물을 이용해 더 큰 이익을 보려하는 이들과 살던 곳에서 안정적으로 거주하고자 하는 이들의 입장이 서로 부딪치고 있다면, 이것을 순전히 이익의 문제로만 사유하기는 어렵다. 게다가 법이 항상 전자의 손만 들어주고 있다. 과연 이 법이 윤리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세계인권선언을 비롯한 국제인권규범이 명시하고 있는 주거권은 소유권과 부딪치는 경우 항상 부차적인 것으로 밀린다. ‘사는 곳’이라는 가치가 ‘사는 것’보다 못하다고 말하는 법이라면 문제가 있지 않은가?

강제퇴거금지법, 보다 근본적인 대책

 2009년 1월 20일 용산참사로 여섯 명이 화염에 휩싸여 목숨을 잃었다. 경찰의 과잉진압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높았지만 경찰은 기소조차 되지 않은 채 철거민들만 중하게 처벌받았다. 참사 후 355일 동안 폭력적인 강제퇴거에 문제제기하며 장례가 미뤄지기도 했다. 재개발 사업 진행 과정의 문제에 대해 적지 않은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그 과정에서 용산국민법정이 있었다. 국민법정이 열리면서 잘못된 개발 정책을 바꾸고 폭력적인 강제퇴거를 처벌하기 위한 법이 필요하다는 제안이 많이 모였다. 장례 후 ‘용산철거민살인진압 범국민대책위원회’가 ‘용산참사 진상규명 및 재개발제도 개선위원회’로 전환하면서 강제퇴거금지법을 제정하기 위한 구체적인 준비가 시작됐다.

 2010년에는 개발과 강제퇴거 문제에 관심을 기울여 온 인권․사회단체와 철거민단체들이 워크숍을 진행하면서 법안을 마련했다. 그해 겨울에는 강제퇴거감시단을 운영하며 7개 지역에서 개발과 강제퇴거의 문제점을 조사하고 밝히는 활동을 하면서 강제퇴거금지법의 방향과 세부 내용을 점검하기도 했다.

 2011년 1월 용산참사 2주기를 맞아 추모토론회를 열었는데 이 자리에서 강제퇴거금지법안을 발표하고 다양한 의견을 수렴할 수 있었다. 이때 나온 의견들과 이후 연속으로 진행된 쟁점포럼을 통해 전문가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지금의 강제퇴거금지법안이 나왔다.

 강제퇴거금지법은 기존에 나온 용역규제 법안이나 정책과는 어떤 면에서 다를까?

 우선 강제퇴거금지법은 “모든 사람은 적절한 주거에 대한 권리를 갖는다.”라는 상식을 권리로 명시한다. 매번 위협받던 ‘주거권’을 국가와 지방자치단체가 나서서 보호해야할 책임이 있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지금까지 재개발 당사자 중 하나로 강제퇴거를 방관·조장하였으나, 강제퇴거금지법이 제정되면 강제퇴거를 예방하기 위해 책임을 다해야 할 의무를 분명하게 지게 된다.

 둘째로, 기존의 이익 중심, 미관 중심의 개발과는 달리 강제퇴거금지법은 거주민들의 인권 증진에 기여하는 방향으로 진행되는 개발로 방향을 전환토록 한다. 보다 크고 보기에 세련된 개발이 아니라 거주민들이 실제로 필요로 하는 방식의 개발을 위해 거주민들이 실질적으로 의견을 개진하고 협의할 수 있는 절차를 강제한다. 여기서 ‘거주민’은 기존의 가옥 소유주를 포함하여 그 지역에서 거주하거나 일하는 사람을 말한다. 그 지역에 삶의 터전을 두고 있는 사람 모두 강제퇴거금지법의 보호를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이다.

 셋째로, 거주민들의 재정착 권리를 보장한다. 서울시가 2008년 국회 행정안전위 김희철 의원(민주당)에게 제출한 ‘서울 재개발·재건축 원주민 재정착률 현황’ 자료에 따르면, 서울 시내 재개발 지역의 원주민 재정착률은 44%에 불과했다.

 재개발 지역은 지은 지 20~40년이 넘은 노후한 건물 밀집 지역이기 때문에 저소득층의 비율이 높다. 저렴 주거는 사라지는데, 거주민들에게 적절한 재정착대책은 보장되지 않은 상태에서 재개발 사업이 무리하게 진행되고 있는 실정이다. 강제퇴거금지법은 개발 관련 개별 법령들에 앞서 모든 거주민들에게 재정착 권리가 있음을 밝히고 있다. 이에 대해 재개발 사업자들은 거주민들이 개발 사업 시행 전과 동등한 수준으로 거주하거나 일하는 것을 보장하는 재정착 대책이 수립해야하고, 이에 대해 거주민들과 성실한 협의를 해야만 한다.

 마지막은 여타 다른 용역규제 법안과 정책을 포함하는 성격이다. 강제퇴거 과정에서 발생하는 용역업체 직원들의 폭력과 그에 대한 공무원의 책임 방기는 강제퇴거 현장의 고질적인 문제다. 기존 법원의 판결은 소유권을 주장하는 개발 사업의 시행 주체나, 계약 만료를 내세워 주거 대책이 막막한 세입자들을 쫓아내는 개별 소유주들의 손을 들어주고 있다. “내 재산을 내 마음대로 한다는데 무슨 상관이냐.”는 말에 끄덕이고 있는 것이다. 누군가 그곳을 사지는 못했지만 삶의 터전으로 가꾸고 정착해온 사정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은 큰 문제다. 강제퇴거금지법은 재정착 대책에 대해 협의가 완료되지 않을 때 퇴거를 자의적으로 할 수 없도록 규정함으로써 강제퇴거를 근본적으로 예방하고자 한다. 피치 못할 퇴거 과정에서 용역업체 직원들의 폭력을 처벌할 수 있는 규정을 두고, 이를 감독할 책임이 있는 공무원에 대한 처벌 규정도 마련함으로써 강제퇴거 현장의 폭력을 예방하려고 한다.

강제퇴거금지법 제정, 험난하지만 꼭 해야 할 일

 새로운 법안이 제정되기까지 언제나 많은 난관이 있고 넘어야할 장애물들이 있다. 강제퇴거금지법은 대형 건설사들과 재개발 조합의 이익보다 세입자를 비롯한 거주민들의 ‘거주권’을 우선하고 있기에 제정되기까지의 과정이 결코 쉽지는 않을 것이다. 더 큰 이익을 가져다주는 종자돈으로서의 부동산이 아니라 삶의 터전으로서의 거주지를 사유한다는 점에서 강제퇴거금지법은 우리 사회의 거주에 관한 문법을 새로 쓰자는 가볍지 않은 제안을 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 난관에도 불구하고, 강제퇴거금지법 제정은 머뭇댈 수 없는 시급한 대책이기에 차질 없이 추진되어야 한다. 2009년 용산에서 벌어진 끔찍한 악몽은 잊혀 지기는커녕 상도동으로, 명동으로, 포이동으로…, 점차 더 자주 되살아나고 있다. 재개발 사업 구역이 늘어날수록 그만큼의 절규가 더 커지고 있는 현실에서 강제퇴거금지법은 그 필요성이 더욱 커지고 있다. 강제퇴거금지법 제정을 통해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다시 묻지 않는다면, 재개발의 야만은 제어되기 어려울 것이다. 용역의 잔혹한 폭력에 대한 분노는 이제 근원적인 예방을 위한 제도 마련으로 이어져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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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04 20:20

우리는 우리의 삶을 어떻게 말할 것인가-『우리가 잘못 산 게 아니었어』서평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에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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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페이스북 타임라인을 보다가 깜짝 놀랐다. 평소에 정치적인 글을 올리지 않던 이들도 죄다 김문수 도지사 뉴스를 링크해두고는 ‘뭐야 이 인간!’이라며 분노를 표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곧이어 그 사건을 풍자하는 패러디물이 줄이어 올라왔다. 그날 하루, 타임라인은 김 지사에 대한 분노로 가득 찼다.
 
김문수 안의 ‘김 부장’
 
사건은 이랬다. 지난 달 말 한 노인요양원에 방문한 김 지사는 환자 이송체계 등을 문의하기 위해 소방서에 전화를 했다. 그는 긴급전화인 ‘119’번에 전화를 걸어 전화를 받은 소방관에게 “도지사 김문수입니다.”라고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
 
장난전화로 여긴 근무자가 전화를 끊자 다시 전화를 건 김 지사는 전화를 받은 다른 소방관에게 바로 전 전화를 받은 근무자의 관등성명을 요구했다. 이 근무자 역시 장난전화로 여겼고, 두 소방관은 모두 좌천되었다.
 
이 사건에서 김문수 도지사의 권위적인 행태는 비난받아 마땅했다. 그러나 여러 사건들 중에서도 왜 이 사건은 저렇게 널리 공분을 사게 만들었을까? 자신은 정치적이지 않다고 말하던 이들까지도 ‘뭐야 이 인간!’이라며 분노를 표하는 모습이 낯설었다. 김문수라는 사람이 너무도 독특한 일을 벌여서 그랬을까?
 
도지사이기 때문에 긴급전화에 대고도 “도지사입니다” 한 마디면 설설 길 거라 여기는 그 태도는 보는 사람들을 분노하게 만들지만, 이런 행태는 오히려 익숙하다고도 말할 수 있다. “너 아니어도 일할 사람 많아”라며 항상 우악스러운 태도로 명령하고, 마구 뭐라고 쏘아붙였다가 자기 잘못이라는 게 드러났음에도 미안한 기색 하나 없는 상사들을 직장에서 매일 마주치고 있는 우리 아닌가.
 
그렇다보니 실상 이 사건에 분노하던 이들이 김문수 도지사의 행태에서 본 것은 자기 직장 상사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나의 존재를 무시하던 직장 상사에게 차곡차곡 쌓여가던 분노가 이 사건을 통해 터진 셈이다.
 
‘우리 안의 MB’라는 말이 유행하기도 했지만 이 사건에서 우리가 발견한 것은 ‘김문수 안의 김 부장’이었다. 직장에서는 비루하더라도 삼킬 수밖에 없었던 분노가 김문수라는 인물의 행태를 향해 터져 나왔다.
 
그러나 도지사에게 분노의 댓글을 달아도 직장 상사는 꿈쩍도 없다. 아니, 더 나아가 우리의 삶이 계속해 팍팍해져만 간다. 야근이 계속되지만 누구 탓을 할 데가 없다. 피곤한 건 오로지 ‘간 때문’이다. 먹고 살려고 돈을 버는데 돈 버느라 죽겠는 ‘삶’ 그 자체가 문제라는 걸 이제는 다들 느끼고 있다. 다만 벌거벗은 임금님을 보듯 아무도 말하지 못할 뿐이다.
 
증언과 고백, 그리고 동지와 동료
 
삶 그 자체가 문제가 되고 있지만 정작 나락으로 떨어지는 삶에 대해 말을 해도 들어줄 사람이 없다. 당장에 등록금 문제가 이슈가 되면 대학생들에게 등록금 때문에 얼마나 힘드냐고 묻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등록금 문제와 관련된 이야기일 때로 국한된다. 직장에서의 고된 삶을 이야기하려면 다들 힘든데 나약해빠졌다는 눈총을 받을 각오를 해야 한다.
 
게다가 말한다고 뭐가 바뀌겠냐는 식의 냉소도 삶을 살아가는 이들 사이에 단단히 자리 잡고 있다. 삶에 대해 말한다는 건 임금님이 벌거벗었다고 말하는 것 보다 더 힘들게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엄기호의 이번 책 『우리가 잘못 산 게 아니었어』는 말하기 어렵던 삶에 대한 ‘증언’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가 어떤 삶을 강요받고 있는지를 폭로하는 일이 필요하다. 사회는 우리에게 언제나 이름을 부여하고 그에 걸맞은 생활 방식과 내용을 강요한다.(…)이 삶의 형식에 대한 약속이 제대로 지켜지는지, 이 삶의 형식이 인간이 견디며 살 만한 것인지를 나의 경험을 가지고 드러내고 증언해야 한다. 그래야 이 사회가 해오는 방식대로 사회를 옹호하고 사람을 폭로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사람이 옹호되고 사회가 폭로될 수 있다.”
 
저자는 증언과는 달리 ‘고백’은 사회를 옹호하고 사람을 폭로한다고 구분한다. 대표적인 고백의 형태는 희생양 찾기다. 대표적인 희생양 찾기인 왕따의 경우 개인에게 가해지는 고백의 요구는 이런 표현 속에서 드러난다. “근데, 사실 생각해보면 왕따 당하는 애들이 원인을 제공하기는 해요.”
 
고백의 관점에서는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우선 그 원인을 제공한 개인을 찾는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생각해보라’는 요구는 학교에서 써내야 하는 글에서부터 개신교 일각의 ‘긍정 교리’까지 폭넓게 퍼져있다. 고백을 통해 사회는 보호되고 대신 사람이 폭로되는 것이다.
 
반면에 증언은 정반대로 사회를 폭로하고 사람을 옹호한다. 저자는 증언의 힘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증언은 그리 녹록한 작업이 아니다. 무엇보다 증언을 하려면 스스로를 우리 사회의 권력이 작동하는 공간으로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 권력에 의해 자신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를 말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여기서 말하는 진실에 대한 용기는 용기를 가지고 세상에 맞서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권력에 대해 증언한다는 것은 권력에 맞서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그 권력에 내가 얼마나 철저하게 무력할 수밖에 없었는가를 드러내는 것이다. 이것이 더 강력한 ‘진실에 대한 용기’다.”
 
저자는 이처럼 증언의 힘을 신뢰하면서 사회를 폭로하고 사람을 옹호하고자 노력한다. 저자가 만났던 일상을 살아가는 많은 이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카이스트 학생들, 그리고 “운명이다”라며 또한 불운한 죽음을 맞이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삶들과 이들의 증언을 통해서 우리의 삶이 어떻게 함께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는지 설명하고 있다.
 
IMF 이후로 더 이상 “내일이 오늘보다 더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면서 급격히 변한 우리의 삶과, 우리가 기대하면 할수록 삶에서 더욱 절망하게 되는 까닭에 대해서도 자세히 다루고 있다.
 
아이러니한 것은, 책이 파국으로 떨어진 삶에 대해 설명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논의를 따라 읽다보면 ‘희망’을 기다리는 용기를 얻게 된다는 점이다.
 
저자는 약속된 미래를 위해 힘차게 돌격하는 식의 ‘기대’와 희망은 다르다고 구분한다. 희망은 “늘 깨어 있으라”던 예수의 가르침과 같다. 어느 날 느닷없이 찾아올 희망이 찾아왔을 때 기쁘게 맞이할 수 있는 긴장감이 희망에는 중요하다.
 
하지만 이런 태도는 혼자서는 불가능하다. 저자는 함께 희망을 기다려줄 수 있는 ‘동료’를 강조한다. 동료 역시 ‘동지’와는 다르다. 동지가 뜻을 나눈 사람이라면 동료는 삶을 나누고 응원해주는 사람이다.
 
이처럼 저자는 미세하지만 명확하게 달라지는 용어들의 쌍들을 제시하고 있다. ‘경험과 체험’, ‘분노와 격노’, ‘공감과 동감’, ‘기대와 희망’ 등등…, 저자는 이러한 용어들 사이의 차이를 통해 우리의 삶을 보다 면밀하게 증언하고 희망을 기다릴 수 있는 용기 또한 발견하고자 노력한다.
 
정치적이지 않은 책?
 
 이 책은 쉽게 주목받지 못하는 ‘삶’에 대한 중요한 통찰을 담아내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의 통념은 정치와 일상 사이에 넘을 수 없는 벽을 높게 쌓아둔다.
 
스스로를 진보적이라고 여기는 사람들도 먹고 살기 위해서 주식, 부동산 투자로 생계를 이어가곤 한다. 대중 집회에서 목청껏 구호를 외치던 이도 회사에 돌아오면 끽소리도 못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자신 있게 ‘내가 이정도로 멋졌어!’라고 말할 수 없는 일상의 ‘삶’에 관해서는 이야기하지도 않고, 들어줄 거라 기대도 하지 않는다. 이렇게 우리 삶은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고 밀려나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잘못 산 게 아니었어』를 두고도 “정치적이지 않다”는 반응이 나오곤 한다. 당장 내년에 선거가 연이어 있는 상황에서 ‘공감’, ‘경험’, ‘동료’ 등을 이야기하는 게 한가하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삶’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는 선거 구호에서조차도 피할 수 없는 문제다. 저자가 서문에서 지적하고 있듯 “내 삶을 바꾸는 첫 번째 서울시장”과 “내 삶을 응원하는 첫 번째 서울시장” 간에는 미묘하지만 분명히 다른 삶에 대한 접근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타인의 삶을 바꿔야할 것으로 보는 것과, 응원하고 함께 할 것으로 보는 것은 완전히 다른 접근이다. 게다가 삶이 쉽게 바뀌지도 않는다. 저자가 강조하는 것처럼, 중요한 건 파국에 처한 삶을 어떻게 함께 견디면서 ‘희망’을 깨어 맞이할 것인가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삶에 대해 이야기해야만 한다. 『우리가 잘못 산 게 아니었어』가 반가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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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01 22:46

새해 맞이 포스팅

어렸을 때 오랫동안 수영 개인레슨을 받았었다. 한 살 때 대천 앞바다에서 아버지가 장난을 치셔서 물 속에서 거의 죽다 살아난 뒤에 나는 극도로 물을 무서워했다. 그래서 공포감을 극복하게 하려고 어머니는 개인레슨을 붙여 주셨다.

수영장 바닥에서 발을 떼지 못하는 수강생을 두고 고민하던 강사는 재미있는 게임을 하자고 제안했다. 탈의실 키를 수영장 바닥에 빠뜨리더니 누가 먼저 저걸 잡아 올리는지 내기를 하자고 했다.

장난같은 내기라 마음이 편해져서 나는 바닥에 떨어져있는 키를 잡으려고 머리를 깊숙하게 쳐박았다. 하지만 머리를 집어넣을수록 몸이 계속 떠올라서 키를 잡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한참을 바둥대던 중에, 몸이 뜨려면 머리를 최대한 깊숙하게 물에 넣어야 한다는 사실을 불현듯이 깨닫게 됐다. 그간 가라앉을까 무서워서 쳐들었던 머리가 문제였던 것이다.

이 경험은 내겐 하나의 좌우명과 같다. 내 얼굴을 드러내고 싶을 때 오히려 몸은 가라앉는다. 내 얼굴을 깊숙하게 집어넣을 때 비로소 몸은 뜬다. 자주 겁 때문에 얼굴을 쳐들어 일을 망칠 때마다 나는 이 경험을 되새길 필요를 느끼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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